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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로 본 <비긴어게인> 그레타/댄/감정선

by good-add 2025. 7. 17.

영화 ‘비긴어게인(Begin Again, 2013)’은 음악과 감정, 그리고 삶의 방향을 다시 정립해 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풀어낸 작품입니다. 존 카니 감독 특유의 절제된 감정선과 도시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단순한 음악영화나 로맨스가 아닙니다. 오히려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삶을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이 중심에는 두 명의 주인공,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와 (마크 러팔로)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 두 인물의 캐릭터 분석을 통해 ‘비긴어게인’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겠습니다.

 

비긴어겐인

1. 그레타 – 상처받은 창작자에서 독립적인 아티스트로

그레타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한 남자의 연인으로, 그의 음악적 조력자로 등장합니다. 그녀는 뮤지션 데이브 쿨(애덤 리바인 분)과 함께 음악을 만들어왔지만, 데이브가 스타덤에 오르며 그레타는 그림자처럼 그의 뒤에 머무릅니다. 결국 데이브의 외도로 인해 관계가 파국을 맞고, 그레타는 뉴욕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홀로 남게 됩니다.

그레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겉으로 강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녀는 분노하거나 오열하지 않습니다. 대신, 감정은 노랫말과 멜로디에 배어 있습니다. “A Step You Can’t Take Back”이나 “Lost Stars” 같은 곡은 그레타의 내면을 대변하는 텍스트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감정들을 음악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술적 표현’이 아니라 자기 회복의 한 방식입니다.

그레타는 댄을 만나며 변화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댄은 그녀의 음악적 가능성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상업성과 무관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이 만남은 그레타에게 ‘나도 혼자서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죠. 이후 그들은 스튜디오도 없이 뉴욕 곳곳을 돌아다니며 앨범을 제작합니다. 이 과정은 단순히 녹음이라는 기술적인 작업을 넘어, 그레타가 창작자로서 독립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상징적 여정입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영화 후반부에서 그녀가 데이브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의 음악을 무료 스트리밍으로 배포하는 장면입니다. 상업적 성공보다 자신의 방식으로 음악을 공유하고 싶은 그녀의 선택은, 모든 예술가가 꿈꾸는 자유로운 창작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레타는 더 이상 데이브의 연인이 아닌, 댄의 파트너도 아닌, 스스로를 지키는 독립적 아티스트로 거듭납니다.

2. 댄 – 무너진 인생에서 다시 열정을 찾는 중년의 자화상

댄은 영화가 시작될 때, 인생의 가장 낮은 지점에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한때 잘 나가던 음반 프로듀서였지만, 지금은 아내와 별거 중이고 딸과도 소원해졌으며, 회사에서도 해고당한 상태입니다. 그에게 있어 음악은 더 이상 영감의 원천이 아니라, 과거의 영광에 불과한 회색빛 기억입니다.

그런 댄이 변하게 되는 계기는 바에서 우연히 들은 그레타의 노래 한 곡입니다. 이 장면에서 그는 단지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상상’합니다. 그녀의 어쿠스틱 기타 위에 하나씩 악기를 올리고, 사운드를 덧입히며 완성해 가는 환상을 통해 그가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있으며, 아직 감각이 살아있다는 것을 관객은 직감하게 됩니다.

그레타와 함께 앨범을 제작해 나가는 동안, 댄은 점점 더 활기를 되찾습니다. 처음에는 그녀를 ‘구해주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레타를 통해 자신이 구원받고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그는 그녀를 통해 음악의 순수함을 다시 경험하고, 딸과의 관계도 회복하며, 아내와도 어색하지 않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댄의 성장 또한 그레타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거리 녹음, 스트리밍 발매 등)에 유연하게 적응합니다. 이는 단지 기술적인 변화가 아닌, 자기 기준과 시선을 다시 쓰는 전환의 상징입니다. 음악은 그의 과거이자 미래이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3. 감정선 – 사랑이 아닌 연대로 완성된 두 사람의 서사

‘비긴어게인’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이토록 감정적으로 깊이 연결된 두 인물이 연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영화가 이런 감정선에서 로맨스로 자연스럽게 넘어가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인생을 바꾸는 중요한 인물이 되지만,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관객에게 오래 남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레타와 댄의 관계는 존중과 신뢰, 그리고 창작의 과정에서 맺어지는 ‘연대’의 서사입니다. 그들은 음악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말없이 감정을 나누며,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낮은 순간에 서로에게 닿습니다. 이 감정은 사랑이 아닌 깊은 공감과 연민에서 비롯된 동행입니다.

거리에서 녹음하는 모든 장면, 이어폰을 나눠 끼고 도시를 걷는 장면, 마지막 클럽에서의 진심 어린 대화는 전부 둘 사이의 감정 온도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말은 많지 않지만, 시선과 몸짓, 음악으로 모든 감정을 전달합니다. 그레타가 데이브의 무대를 거절하고, 댄이 웃으며 그녀의 선택을 지지하는 장면은 사랑보다 더 큰 지지를 보여주는 감정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이러한 감정선은 우리에게 진짜 관계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이 영화는 ‘사랑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의 경계를 확장해 보여줍니다. 우리가 꼭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그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공감과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인연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비긴어게인’은 상실과 실패에서 시작해, 자기 회복과 성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레타와 댄은 각자의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음악을 통해 다시 연결되고, 자신을 돌아보며,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여정은 화려하지 않고, 거창하지 않으며, 단지 조용하고 꾸준합니다. 그렇기에 더 진실합니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인물들이 음악을 통해 자신을 되찾는다는 점에서 감정적으로 매우 보편적인 울림을 준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무너졌던 순간이 있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비긴어게인’은 그런 이들에게 말없이 손을 내밉니다. “괜찮아요. 당신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이 영화가 전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이자, 우리가 영화를 통해 치유받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