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세월과 함께 변합니다. 한때는 ‘위대한 왕’과 ‘승리한 제국’ 중심으로 서술되던 역사가, 이제는 그 이면에 가려졌던 실수와 오판, 비극과 실패의 연대기를 돌아보는 방식으로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있는 책이 바로 톰 필립스(Tom Phillips)의 『인간의 흑역사(Human Errors: A Brief History of Stupidity)』입니다.
이 책은 인류의 역사에서 찬란한 성취보다 더 많은 ‘실수의 흔적’을 추적하며,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 아닌, 실수의 총합으로 바라보는 신선한 시선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 실수의 반복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풍자와 통찰로 풀어냅니다.
1. 위대한 역사? 실수의 축적일 뿐이다
우리는 종종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필립스는 질문을 바꿉니다. “정말 우리가 교훈을 얻기 위해 역사를 보는가? 아니면, 반복적으로 실수해도 변명할 거리를 만들기 위해 보는 건 아닌가?”
그의 시선은 뚜렷합니다. 인류는 생각보다 훨씬 많이, 그리고 자주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해 왔다는 것입니다. 고대 로마의 정치인들이 저지른 실책, 중세 유럽에서 벌어진 비과학적 광기, 근대 제국주의의 오만함, 20세기와 21세기 기술 오판까지—책은 다양한 시대를 넘나들며 ‘멍청한 선택’의 연대기를 만들어냅니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이 책이 ‘실수’를 단순한 에피소드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패와 실수 뒤에 존재하는 인간의 심리, 권력, 정보 왜곡, 사회적 압력을 차근차근 분석해 나가며, 역사가 오직 ‘위대한 업적’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2. 바보 같은 실수들, 하지만 너무 인간적인 장면들
책에서 소개하는 역사적 ‘흑역사’는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무섭도록 우리와 닮아 있습니다. 다음은 그중 몇 가지입니다:
▪ "그냥 놔두지 그랬어" - 영국의 토끼 재앙
호주의 생태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 토끼는, 사실 ‘사냥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들여온 동물입니다. 당시 영국 귀족들은 사냥을 위해 토끼 몇 마리를 풀어놓았고, 그 결과 수백만 마리가 번식하며 생태계 파괴, 농업 손실, 환경 파괴라는 3중 재앙을 가져옵니다.
▪ 무지한 믿음이 만든 재앙 - 마녀사냥
유럽 중세에서 수세기에 걸쳐 벌어진 마녀사냥은, 실제 증거보다 ‘공포와 집단심리’에 기반한 의심과 폭력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재채기나 가축 폐사도 ‘마녀의 저주’로 연결됐고, 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화형대로 끌고 갔습니다.
▪ 현대판 실수 - 석면, 납, DDT, 그리고 기술 신뢰
근대 산업의 발달은 혁신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무분별한 기술 낙관주의가 치명적인 건강 피해와 환경오염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석면은 ‘불에 안 타는 기적의 물질’로 여겨졌지만, 수십 년 뒤 그 위험성이 밝혀졌고, 납은 ‘유용한 금속’에서 ‘조용한 살인자’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단순히 “그땐 무식해서 그랬지”라고 치부하기 어려울 만큼, 현재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우리가 맹신하고 있는 것은, 미래에는 또 다른 흑역사가 되지 않을까?”
3. 왜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책의 후반부는 더욱 철학적인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왜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이에 대해 필립스는 다음의 네 가지 이유를 중심으로 분석합니다:
① 인지 편향(Cognitive Bias)
인간은 사실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에 더 끌립니다. 이는 역사 속 수많은 독재자나 잘못된 결정을 내린 정치인, 사회 전체가 위험한 길로 빠졌던 사건의 핵심 배경이 됩니다.
② 집단사고(Groupthink)
다수의 의견이 곧 정답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는 소수 의견이 무시되고, 잘못된 방향으로 전체가 휘둘리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역사 속 대량 학살, 전쟁, 정치적 탄압의 상당수가 이러한 구조 속에서 발생했습니다.
③ 권위에 대한 맹목적 신뢰
어떤 직함이나 지위, 직책이 인간을 ‘절대적으로 옳은 존재’로 만드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전문가’, ‘정부’, ‘지도자’의 말이라면 의심 없이 따르곤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때때로 참담했습니다.
④ 단기적 이익 추구
장기적인 결과보다는 당장의 이익, 권력, 표, 돈, 편의를 쫓는 인간의 본성은 종종 크고 작은 재앙의 도화선이 됩니다. 환경 파괴, 자원 고갈, 사회 양극화 등이 그 예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은 과거의 잘못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즉, 『인간의 흑역사』는 과거의 실수를 유머로 조롱하는 책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거울인 셈입니다.
4. 유쾌한 문장 속 날카로운 경고
이 책의 또 하나의 매력은 무거운 주제를 놀랍도록 가볍게 전달하는 문장력입니다. 저자는 유머러스한 문체로 독자의 경계심을 낮추고, 그 틈을 타 뼈 있는 통찰을 전달합니다.
예컨대, 한 대형 전투의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싸움의 교훈은, 때때로 ‘지지 않는 전략’이 ‘이기는 전략’보다 낫다는 것이다. 물론, 둘 다 없었던 게 문제였지만.”
이런 문장들은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동시에 실수와 실패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바꾸게 합니다. ‘비웃음’이 아닌 ‘이해’로, ‘비판’이 아닌 ‘성찰’로 나아가게 하죠.
결론: 완벽하지 않은 인간, 그래서 더 돌아봐야 할 역사
『인간의 흑역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는 위대한 사람들의 성공 서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어리석음이 반복된 연대기다.”
그리고 그것은 슬픈 얘기이기도 하고, 희망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실수는 반복될 수 있지만, 그 실수에서 배우는 것이 인간만이 가진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제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졌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더 많은 편견, 속도, 불안, 그리고 맹신 속에 살아갑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자주,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믿는 것이, 혹시 또 다른 흑역사가 되지는 않을까?”
그 물음을 던지고 싶다면, 『인간의 흑역사』는 꼭 한번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성찰하며, 미래를 더 유연하게 맞이하는 법을 알려주는, 유쾌하고 진지한 안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