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 걸』은 과학자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면서도, 단순한 과학 이야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식물학자 호프 자런(Hope Jahren)이 자신의 성장기와 연구 여정을 식물의 생애 주기와 교차해 풀어낸 과학+에세이+인생철학이 어우러진 명작입니다.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고, 연구비를 마련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주변과 투쟁하며 실험을 이어가는 여성 과학자의 삶은 한 편의 서사극처럼 느껴집니다. 『랩 걸』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과학이란 무엇인가, 삶은 무엇으로 단단해지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1. 과학자의 삶, 그 자체가 연구다
『랩 걸』의 저자 호프 자런은 단지 식물을 연구하는 생물학자가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하나의 실험으로, 모든 경험을 하나의 데이터로 바라보는 태도를 지녔습니다. 이 책은 그녀가 걸어온 과학자의 길을 따라가며, 그 속에서 어떻게 인간적인 고뇌와 감정이 겹겹이 쌓여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책은 그녀가 어린 시절 실험실에서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기억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자연과학을 사랑하게 된 계기, 여성으로서 연구 환경에서 겪은 차별과 고립, 정신질환과의 싸움, 그리고 평생의 동료인 빌과의 우정까지—모든 이야기는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가슴 시리게 펼쳐집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그녀가 과학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과학은 틀릴 수 있지만, 진실에 가까워지는 방향을 향한 끊임없는 질문이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연구라는 행위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연구가 실패하더라도, 실험 결과가 예상과 다르더라도, 그녀는 거기서 삶의 의미와 자신만의 철학을 찾아냅니다.
또한, 그녀는 “랩”이라는 공간이 단지 실험이 이뤄지는 곳이 아니라, 자아와 존재가 형성되는 장소라고 말합니다. 실험실은 고독하고 반복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저자는 성장했고, 부서졌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 치열함과 진심이 이 책의 가장 큰 감동 포인트입니다.
2. 식물과 인간, 닮아 있는 생명들의 이야기
『랩 걸』의 독특한 구조 중 하나는, 각 장마다 식물의 성장 이야기가 끼어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는 과정은 단순한 자연 관찰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삶을 투영한 은유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씨앗이 발아하기 위해선 “어두움 속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빛과 온도, 습도라는 조건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는 씨앗은 마치 미래를 꿈꾸지만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발아의 순간은, 기다림을 견뎌낸 자만이 맞이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장면으로 묘사됩니다.
줄기와 가지가 자라는 과정은 삶의 확장과 도전을 상징합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여러 가지가 뻗어 나가듯, 인간도 여러 역할과 관계 속에서 자신의 방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특히 책 후반부에서는 나무의 생존 방식인 “때로는 성장을 멈추는 것”이 가장 현명한 전략일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합니다. 이 메시지는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는 성장과 경쟁에 지친 우리에게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호프 자런은 식물을 단순히 연구 대상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생명’으로 대합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길가의 작은 나무 하나에도 생명력과 고요한 존재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이 책이 지닌 진정한 힘이며, 과학을 통해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3. 여성 과학자로 살아간다는 것
『랩 걸』은 과학과 자연,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성이 과학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과학계 내부의 불평등, 임금 차별, 성별 고정관념, 연구비 경쟁에서 겪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여성이 연구자로서 커리어를 쌓는다는 것은 단순히 실험에 성공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자리에 계속 존재할 수 있는 힘”을 필요로 합니다. 저자는 그 힘을 어떻게 키워왔는지, 그리고 어떤 순간에 무너졌는지 진솔하게 고백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에게 가장 큰 버팀목이 된 존재는 랩실의 동료이자 친구인 ‘빌’입니다. 빌과의 관계는 낭만적 사랑이 아닌, 믿음과 동료애로 연결된 진짜 인간관계의 힘을 보여줍니다. 둘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며, 실험 실패와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유쾌함과 단단함을 유지하는 방식을 만들어갑니다.
이 책은 “여성 서사”를 강조하지 않지만, 그 속에 녹아 있는 무수한 현실의 벽과 그것을 넘는 감정의 기록은 여성 독자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과학을 업으로 삼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귀하지만, 그 속에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찾은 이야기는 더더욱 귀중합니다.
결론: 실험실에서 삶을 배운 한 사람의 이야기
『랩 걸』은 과학책이면서도, 문학이고, 자서전이며, 동시에 한 편의 성장 드라마입니다. 호프 자런은 실험실에서 식물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삶도 실험하고, 뿌리내리고, 가지 뻗으며, 다시 성장했습니다.
그녀의 실험은 늘 실패했고, 또다시 시작됐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바로 “랩 걸”이라는 존재를 완성한 것입니다.
이 책은 연구자만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어떤 목표를 향해 묵묵히 길을 가는 사람들, 자신의 길을 찾아 헤매는 모든 독자에게 영감과 위로를 건넵니다.
‘삶도 실험처럼 실패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결과를 만들어가는 일. 그것이 『랩 걸』이 전하는 삶의 철학이자, 살아가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