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영화 '미나리'는 단순히 한 이민자 가족의 미국 정착기를 넘어선,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 대한 은유로 가득 찬 작품입니다. 리 아이작 정 감독이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한 이 영화는, 가족, 문화적 이질감, 생존, 희망 등의 테마를 매우 섬세하게 풀어냅니다. 특히 '물', '뿌리', '정착'은 영화 내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닌 강력한 상징으로 작용하며, 인물과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키워드로 기능합니다. 본 글에서는 '미나리' 속 이 세 가지 상징을 깊이 있게 해석하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삶의 본질에 대해 탐구합니다.
물: 흐름, 생존, 그리고 순응의 철학
영화 속 '물'은 단지 농작물 재배에 필요한 자연 요소가 아니라, 삶의 원천이자 인간 존재의 방향성을 암시하는 상징입니다. 제이콥은 가족과 함께 아칸소 시골에 정착하여 농장을 일구고자 합니다. 그는 농업 전문가가 아니면서도 한국 채소를 키워 성공하겠다는 신념을 품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식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의 근간은 '물'이라는 존재에 달려 있습니다.
처음 제이콥이 선택한 농지는 수원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곳입니다. 그는 경제적 비용을 절감하고자 전문가의 조언을 무시한 채 스스로 땅을 파서 물을 찾으려 하고, 결국 실패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물 부족 문제가 아닌, 자신의 이상을 향한 무리한 추진과 그것이 낳는 현실적 한계를 은유합니다. 또한 제이콥이 물줄기를 스스로 통제하려는 시도는,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인간의 오만함을 나타냅니다.
반면 순자가 심은 미나리는 다릅니다. 그것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숲 속 물가에서 스스로 뿌리내리고 자라납니다. 이 장면은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미나리는 물이 흐르는 곳에서 자신의 생존 방식에 맞게 적응하며 번성합니다. 영화는 이를 통해, 생존을 위해서는 억지와 고집이 아닌 흐름에 순응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조용히 전합니다. 미나리는 말 그대로 “물가에 심으면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식물이지만, 그 말 안에는 인간 존재의 회복력과 유연함이 담겨 있습니다.
물은 또한 가족 내의 갈등과 화해의 흐름을 상징합니다. 모니카와 제이콥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집 안의 공기가 건조해지고, 감정의 균형도 무너집니다. 하지만 영화 후반, 큰 화재가 지나간 후 비가 내리고, 그 뒤 순자의 미나리가 더욱 번성하는 장면은, 고난을 지나고 나서야 진정한 삶의 흐름이 다시 시작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물’은 생존의 조건일 뿐 아니라, 변화와 회복의 상징이기도 한 것입니다.
뿌리: 단절된 정체성과 문화의 이중성
'뿌리'는 미나리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상징입니다. 식물의 뿌리는 그 존재를 지탱하는 근원이자 생명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입니다. 인간 역시 정체성과 문화, 역사라는 '뿌리' 없이는 성장하거나 생존할 수 없습니다. 영화 속 이민자 가족은 낯선 땅에 자신들의 삶을 뿌리내리려는 시도를 하지만, 동시에 모국과의 연결을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제이콥은 미국에서 자수성가한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그는 미국식 방식에 익숙해지려 애쓰고,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영어와 미국 사회에 적응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때때로 한국적 가치관과 충돌을 빚고, 특히 아내 모니카와의 갈등을 심화시킵니다. 모니카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중시하며, 익숙하지 않은 미국 시골 생활에 큰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녀에게는 교회 공동체나 외할머니 순자의 존재가 뿌리의 연결고리로 작용하며, 그로 인해 삶의 균형을 겨우 유지합니다.
여기서 순자의 등장은 매우 중요한 상징적 전환점입니다. 순자는 외부 문화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한국적 정서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그녀는 데이빗에게 한약을 먹이고, 한국말을 가르치며, 자연 속에서 미나리를 심습니다. 이 모든 행동은 단순한 습관이나 고집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문화와 삶의 철학을 다음 세대에 이어주려는 시도입니다. 그녀가 심은 미나리는 이후 영화의 핵심 메시지로 부각되며, 뿌리를 잃지 않는 삶이 얼마나 강력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뿌리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지만, 순자와의 교류를 통해 점차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특히 데이빗은 처음에는 순자를 ‘진짜 할머니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한 가족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체득하게 됩니다. 미나리라는 식물은 이 모든 과정을 상징하며, 뿌리 깊은 정체성과 연결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뿌리는 단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기반임을 영화는 조용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착: 공간이 아닌 관계에서 피어나는 ‘집’
이민자들에게 ‘정착’은 단순한 지리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존, 정체성, 관계, 꿈, 희망이 복합적으로 얽힌 행위이며, 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새롭게 정의하는 과정입니다. 영화 ‘미나리’에서 정착은 여러 차례 위기에 처하지만, 그럴수록 가족 간의 진정한 유대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그리고 이 유대는 물리적인 집이나 재산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해와 포용에서 시작됩니다.
제이콥은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농장을 성공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개인의 고집에 가까운 것이었고, 그 결과 가족은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집이 불타고, 농장은 위태롭고, 부부의 관계는 깊은 균열을 보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모든 것을 잃은 순간에 진정한 ‘정착’이 시작됩니다. 불길 앞에서 함께 버티는 부부의 모습은, 물질이 아닌 감정의 터전 위에 세워지는 집의 본질을 상징합니다.
순자의 존재는 또 다른 형태의 정착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아칸소의 낯선 땅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소파에 누워 TV를 보며, 아이들과 대화하고, 미나리를 심는 그 모습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인간적이고 따뜻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방식으로 이민자의 공간에 정착하며, ‘나를 유지하면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미나리는 정착의 상징으로서 완벽한 은유입니다. 그 식물은 이식이 쉬우며, 뿌리만 내리면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고 퍼집니다. 제이콥의 계획된 작물들과 달리, 미나리는 계획 없이 심어졌지만 오히려 가장 잘 자라고 가족의 생계를 이어갈 실질적 가능성이 됩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정착’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는 억지로, 인위적으로 삶을 세우려 하는가, 아니면 흐름을 따라가며 함께 뿌리내리는 관계를 중시하는가?
결국 정착이란 ‘주소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함께 삶을 살아가는 감정의 뿌리를 내리는 과정입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 제이콥이 순자가 남긴 미나리를 바라보는 장면은, 물리적 실패 뒤에도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며, ‘관계’이며, ‘기억’입니다. 영화 '미나리'는 그 정착의 가치를 담담하지만 강력하게 전합니다.
영화 ‘미나리’는 이민자 가족의 삶을 중심으로 ‘물’, ‘뿌리’, ‘정착’이라는 상징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조명합니다. 이 세 가지 키워드는 각각 삶의 조건, 정체성의 근원, 그리고 감정적 연결로 이어지는 여정을 보여주며, 단지 이민자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자연과 인간, 과거와 미래, 고집과 순응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미나리는 그 질문에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답을 전합니다.